은퇴 후에도 일해야 하는 현실, IT 엔지니어는 다를까
어머니 친구분이 다시 마트에서 일하는 이유
며칠 전 어머니와 통화하다 들은 이야기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 분이 몇 년 전 은퇴하셨는데, 요즘 주 3일씩 동네 마트에서 아침 근무를 하신다고 한다. 가스비, 식료품비, 기본 생활비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달걀값이 또 올랐네, 딸기도 예전 두 배야" — 요즘 어머니와 통화할 때마다 이런 말로 시작된다. 그 친구분은 원래 은퇴 후에 자식들 만나러 다니고, 짧은 여행도 다닐 생각이셨다고 한다. 지금은 근무 스케줄과 치솟는 물가, 생각보다 빨리 줄어드는 연금을 중심으로 하루를 짠다.
"은퇴가 서류상으로는 좋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감당하기가 더 어려워"
이 말이 통화 끊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 맴돌았다.

은퇴가 더 이상 '끝'이 아닌 시대
대부분이 떠올리는 은퇴는 단순하다. 평생 일하다가, 연금 받고, 모아둔 돈으로 살아가는 것. 하지만 식료품값이 오르고 전기요금이 두 배가 되고 저축이 예상보다 빨리 바닥나는 순간, 은퇴는 더 이상 결승선이 아니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야 하는 출발점이 된다.
내가 아는 한 분은 매달 연금명세서를 꼼꼼히 들여다본다. 예상 소득을 확인하고, 앞으로 몇 년 치 추정값을 보면서 계획을 조정한다. 연금에서 얼마가 나오는지, 어떤 적금이 이자가 가장 높은지, 물가가 계속 오르면 그 차이를 메우려고 어떤 투자를 해야 하는지까지 다 꿰고 계신다.
또 다른 지인은 계산이 도무지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저축한다. 지출이 빠듯한 달에는 예상보다 일찍 통장에서 돈을 빼야 하는데도 그렇다. "수십 년 모은 돈 건드리는 게 싫지만, 다시 일하는 것 말고는 잔고 줄어드는 걸 막을 방법이 없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두 분의 공통점이 있다. 계획이 부족해서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누구보다 꼼꼼하게 계산했다. 문제는 계산의 전제가 무너졌다는 데 있다.
한국인의 64%가 가진 공통된 걱정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64%가 죽음보다 돈이 떨어지는 것을 더 걱정한다고 한다. 그 배경으로 높은 인플레이션, 불충분한 국민연금, 높은 세금이 꼽혔다.
솔직히 다들 일리가 있는 걱정이다.
은퇴 계획이 실패하는 건 사람들이 저축을 깜빡해서가 아니다. 연금은 천천히 오르고, 적금 이자는 거의 없고, 투자 수익은 들쭉날쭉한데 생활비만 매년 또박또박 올라가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세운 계획의 숫자들이 지금 물가를 못 따라간다.
시스템으로 치면 이렇다. 설계 당시의 트래픽 가정으로 짜둔 용량 산정이, 실제 트래픽이 몇 배로 뛴 뒤에도 그대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 코드는 잘못 짠 게 없다. 전제가 낡았을 뿐이다. 은퇴 계획도 똑같다.
IT 엔지니어도 예외일까
친구 아버지는 평생 건설 현장에서 일하셨다. 큰 연금도 없고, 기대만큼 늘지 않은 퇴직연금에 생활비 쓰고 남은 얼마 안 되는 저축이 전부다. 그래서 허리가 아픈 아침에도, 일이 예전보다 훨씬 힘에 부쳐도 계속 현장에 나가신다.
"결승선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몸이 못 버틸 때까지 가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럼 IT 엔지니어인 우리는 다를까? 연봉이 상대적으로 높으니까, 스톡옵션이 있으니까 이 현실에서 자유로울까?
별로 그렇지 않다.
- 높은 연봉에 맞춰 같이 올라간 생활 수준
- 자녀 교육비와 주택 대출 상환
- 빠르게 바뀌는 기술 탓에 빨라지는 조기 이탈 압박
- 체력 한계로 인한 현업 이탈
오히려 IT는 한 가지 변수가 더 붙는다. 기술 수명이 짧다는 것. 건설 현장은 30년 전 기술이 지금도 어느 정도 통하지만, 우리 쪽은 5년 전 쌓아둔 스택이 빠르게 낡는다. 나만 해도 처음 개발을 시작했을 때 다루던 기술과, 아키텍처·운영·컨설팅을 거치며 손에 익힌 기술은 거의 겹치지 않는다. 계속 새로 배우지 않으면 시장에서 내 단가가 알아서 떨어진다. 연봉이 높다는 건 그 단가를 유지하는 비용도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구조적 문제가 만든 잔인한 현실
이 상황이 우연은 아니다. 은퇴 계획은 안정적인 물가, 신뢰할 수 있는 투자 수익, 저축의 가치 보전을 전제로 깔고 짜인다. 하지만 현실은 식품비 상승, 높은 에너지 요금, 계속 오르는 의료비, 노년까지 따라붙는 부채 상환으로 채워진다.
전제 세 개가 동시에 흔들리면, 그 위에 올린 계획은 버티지 못한다. 매년 더 많은 은퇴자가 예상보다 빨리 통장을 비우고, 기본 생활을 위해 신용카드에 기대거나, 계획보다 몇 년 일찍 저축을 헐고 있다.
그래서 질문은 피할 수가 없다. 실제로 누가 은퇴할 수 있나?
대규모 포트폴리오, 빚 없이 완전히 갚은 집, 그리고 생활비와 함께 오르는 소득원. 이 세 가지를 다 가진 사람만 진짜 은퇴를 한다. 나머지는 지출을 줄이고, 예상보다 빨리 저축을 소진하고, 계산이 맞지 않아 65세가 넘어서도 일자리를 찾는다.
핵심은 마지막 항목이다. 생활비와 함께 오르는 소득원. 고정된 연금이나 다 써버리면 끝인 저축과 달리, 물가를 따라 같이 움직이는 소득이 있느냐 없느냐가 갈림길이다. 인프라로 치면 트래픽에 맞춰 자동으로 늘어나는 오토스케일링 구조를 갖췄느냐, 고정 서버 몇 대로 버티느냐의 차이다.
IT 엔지니어의 대비책
그럼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 다변화된 소득원 구축: 기술 블로그, 온라인 강의, 컨설팅처럼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는 일. 체력보다 누적된 경험이 무기가 되는 쪽
- 지속적인 기술 업데이트: 현업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학습. 이건 선택이 아니라 단가 유지 비용이다
- 현실적인 은퇴 계획: 물가상승률을 넣은 보수적인 계산. 낙관적 가정은 가장 비싼 버그가 된다
- 부동산과 주식의 균형: 한쪽에만 의존하지 않는 포트폴리오
- 건강 관리: 가장 기본이면서 가장 중요한 투자. 결국 마지막까지 버티게 해주는 건 몸이다
다 좋은 말이지만, 내가 가장 무게를 두는 건 1번이다. 나머지가 방어라면 1번은 유일한 공격이다. 컨설팅을 하면서 느낀 건, 나이가 들수록 시장에서 팔리는 건 최신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비슷한 문제를 여러 번 풀어본 경험'이라는 점이다. 코드 → 아키텍처 → 운영 → 컨설팅을 거치면서 같은 문제가 자리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를 직접 겪었는데, 그 누적이야말로 물가를 따라 같이 오르는 소득원에 가깝다.

변화하는 은퇴의 의미
65세가 넘은 분들이 마트에서 카트를 밀고, 계산대에 서고, 선반을 정리하는 모습이 이제 낯설지 않다. 은퇴는 더 이상 경력의 끝이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은퇴는 몸이 버틸 때까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일해야 하는 현실을 뜻한다.
IT 업계에서 일하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연봉이라는 숫자가 잠깐 시야를 가릴 뿐, 전제가 무너진 시스템 위에 서 있는 건 똑같다. 지금부터라도 이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는 준비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문득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우리가 손봐야 할 건 은퇴 계획이 아니라 '은퇴'라는 단어 자체의 정의일지도 모르겠다. 일을 멈추는 시점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시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