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량 늘리기가 아니라 독서 질 높이기가 답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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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을 읽어도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2년 전쯤 저는 좀 미쳐 있었습니다. 논픽션 책을 하루 종일 읽어댔거든요.

소셜미디어에서 흔히 보이는 "1년 100권 챌린지", "하루 10권 읽기" 같은 과시용 숫자들. 처음엔 흘려봤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 경쟁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북스타그램까지 시작했죠.

예쁜 책 사진 찍고, 명언 올리고, 책탑 쌓고. 가끔은 그 책들을 실제로 읽기도 했습니다.

당시 제게는 공동체가 필요했고,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필요했습니다. 한동안은 효과가 있는 것 같았어요. 책을 한 권씩 끝낼 때마다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저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의 개수를 세고 있었다는 걸요.

시스템으로 치면, 처리량(throughput)만 높이고 있던 겁니다. 초당 몇 건을 처리했는지는 화려한데, 정작 그 데이터가 어디에도 저장되지 않고 휘발되는 구조였던 거죠.

속독이라는 달콤한 거짓말

소셜미디어가 제게 팔았던 공식은 단순했습니다.

  • 수량 = 성장
  • 속도 = 지능

저는 이걸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요.

배변 시간까지 최적화하고 17단계 아침 루틴을 따라야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떠드는 세상. 거기에 한참 물들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책을 더 빨리" 역시 그 초효율 환상의 일부였죠.

하지만 서서히 균열이 생겼습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거든요. 새로 배운 것도 없고, 생각이 바뀐 것도 없었습니다.

계속 책을 사고, 읽고, 추천 목록을 쫓아다녔지만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독서가 아니라 정보 소비를 하고 있었다는 걸요.

소비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순간적으로는 뭔가 배운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캐시에 잠깐 떴다가 사라지는 데이터 같은 거죠. 그때 알았습니다. 독서란 내 안에서 무언가를 바꾸지 않는 한 진짜 독서가 아니라는 걸요.

관점이 바뀌거나, 신념이 흔들리거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거나, "아하" 하는 순간. 이런 게 없으면 그냥 시간 낭비입니다.

뇌과학이 말하는 속독의 한계

"Make it Stick"이라는 책에서 읽은 구절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학습은 노력이 필요할 때 더 깊고 오래 지속됩니다. 쉬운 학습은 모래에 글씨를 쓰는 것과 같아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사라집니다."

우리 뇌의 작업 기억 용량은 생각보다 훨씬 작습니다. 밀러의 법칙에 따르면 한 번에 7±2개의 정보 덩어리를 처리할 수 있다고 했는데, 최근 연구에서는 그것도 과대평가라고 보더군요. 실제로는 4개, 어쩌면 그보다 적을 수 있다고요.

속독할 때는 뇌가 감당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밀어넣게 됩니다. 버퍼는 작은데 입력만 폭주하는 상황이죠. 그러면 대부분 드롭됩니다. 점들을 연결하지 못하고, 장기 기억으로도 넘어가지 못해요.

남는 건 그냥 잡음입니다.

지금 제가 속독을 쓰는 경우는 딱 하나입니다. 그 책이 제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지 필터링할 때만요. 많은 책들이 같은 아이디어를 조금씩 다르게 포장해 내놓거든요. 일종의 재탕이죠. 그런 걸 읽으며 "독서 많이 했다"고 착각하며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독서는 목적이 있는 활동이다

그쯤 깨달았습니다. 독서도 목적 지향적인 활동이라는 걸요.

모든 책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건 아닙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질문이 다르고, 모든 책이 똑같은 깊이와 관심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떤 책은 그 내용이 정말 필요할 때만 의미를 가집니다. 반대로 어떤 책은 시기가 어긋나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유행하는 책 대신 제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던 질문에 답을 주는 책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비로소 천천히 읽는 것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제 뇌가 의도적인 독서를 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거죠.

목적 있는 독서의 실제 경험

핵심은 읽는 내용과, 그 순간 마음이 실제로 궁금해하는 것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무작위로 책을 읽을 때는 모든 게 산만했습니다. 서로 연결되는 게 없고, 좋은 책조차 어딘가 겉도는 느낌이었죠.

그런데 간절히 답을 원하던 질문에 초점을 맞추자 갑자기 모든 게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한 번에 4~5권을 골라, 하나의 아이디어가 여러 책에 걸쳐 다른 개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의 연결망이 생기거나, 어떤 개념이 왜 타당한지 납득할 만큼 충분한 근거가 쌓였어요.

특정 주제를 폭넓게 읽으면 자연스럽게 여러 관점이 들어옵니다.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균형 잡힌 이해가 생기는 거죠. 연결을 통해 지식을 쌓는 방식입니다. 과도하게 밀어넣는 게 아니라, 뇌가 읽은 내용을 흡수하고 소화할 여유를 줄 때 가능한 일이고요.

책을 포기하는 용기

이 과정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좋은 책이라고 평가받는 책들을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작한 걸 미완성으로 남겨두는 것. 그리고 단지 제 타이밍이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둘 다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끝까지 읽지 않는 게 제 인격을 드러내는 일처럼 느껴졌거든요. 책을 포기하는 게 인생을 포기하는 것 같은, 그런 과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지만요.

모든 책이 내 목적에 부합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동떨어진 느낌을 줄 수 있어요.

그래서 효과 없는 것에 매달리며 시간을 버리는 걸 그만뒀습니다.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추천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냥 시간 낭비예요.

창의력은 연결에서 나온다

흥미로운 건, 창의력이 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는 것들의 연결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창의성은 기본 토대 위에 쌓입니다. 뇌가 가져다 쓸 수 있는 구성 요소가 많을수록 더 풍부해지죠. 단순히 무작위로 떠오른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존 지식을 새롭게 잇는 방식, 더 복잡한 문제를 푸는 새로운 경로 같은 거요.

이런 식으로 책을 읽다 보니 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호기심을 따라갈수록 책들이 서로 엮이는 느낌이 들었어요. 한 책의 아이디어가, 몇 달 전 다른 책에서 밑줄 쳐둔 내용을 비로소 명확하게 설명해주기도 했고, 심리학 개념이 역사책의 한 장면과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결고리는 억지로 만든 게 아니었습니다. 천천히, 목적을 가지고 읽기 시작하자 통찰이 알아서 떠올랐어요.

이 감각을 익히고 나니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르는 것도 한결 쉬워졌습니다.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아이디어를 더 다듬어야 하는지, 어떤 질문에 아직 답이 모자라는지 감이 잡혔거든요.

호기심 자체가 나침반이 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진짜 독서의 기준

지금 제가 삶의 지침으로 삼는 건 이겁니다.

궁금한 주제가 생기면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한 권으로 충분할 때도 있고, 다섯 권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다섯 권 모두 덮어버립니다. 그 어떤 책도 제가 정말 원하는 걸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죠.

독서가 무작위적인 게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 됐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칭호를 모으는 게 아니라 정말로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뿐입니다.

이 책이 내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가? 내 머릿속에 이미 짜여 있는 생각의 틀에 의미 있는 무언가를 더해주는가?

책이 내 생각을 바꾸거나, 깊이를 더하거나,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빨리 읽었는지, 몇 명이 추천했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책을 덮은 뒤에도 머릿속에 남는 것. 결국 그게 전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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