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스파이더맨, 오디세이 — 세 편을 몰아 보고 알게 된 내 취향의 구조
평점과 내 재미가 자꾸 어긋난다
최근에 극장에서 세 편을 몰아 봤습니다. 호프, 스파이더맨 신작, 그리고 오디세이. 다 보고 나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세상 평가와 제 반응이 자꾸 어긋납니다. 그래픽으로 까이는 영화가 재밌었고, 다들 무난하다는 영화가 지루했고, 3시간짜리가 제일 짧게 느껴졌습니다.
이럴 때 저는 직업병이 나옵니다. 결과가 예상과 다르면 로그를 뜯어보는 버릇. 세 편의 관람 로그를 뜯어봤더니, 제 취향의 구조가 생각보다 선명하게 나왔습니다.
호프 — 까이는 이유를 알겠는데, 재밌었다
호프는 그래픽으로 까이는 영화입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전 정보 거의 없이, 감독이 누군지만 보고 들어갔습니다. 이게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초반은 정말 재밌었습니다. 설정 자체가 신선해서 "이 다음엔 뭐가 벌어지지?"라는 질문이 계속 생겼습니다. 중반은 살짝 늘어졌는데, 그 와중에도 긴장감은 유지됐습니다. 문제는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한 게 아니라 클라이맥스 직전에 잘라버렸습니다. 한창 힘주다가 멈춘 느낌이라, 극장 불이 켜졌을 때 잠깐 어리둥절했습니다. 이게 끝이라고?
그런데도 총평은 괜찮았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2편이 궁금하니까. 결말에 화가 났는데 다음 편이 기대된다는 건, 이 영화가 세계관과 미스터리를 심는 데는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한국 영화에서 이런 종류의 신선함은 흔치 않아서, CG가 어색한 장면 몇 개는 그냥 넘어가게 되더군요. 완성도와 재미는 같은 축이 아닙니다. 저는 완성도에 생각보다 관대하고, 대신 다른 축에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파이더맨 — 가진 카드를 안 쓰는 플레이어를 보는 답답함
그 다른 축이 뭔지는 스파이더맨에서 드러났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지루했습니다. 액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감정 장면이 너무 많고 길어서, 주인공이 나약해 보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설정 자체는 흥미로운 판입니다. 능력은 그대로 있고, 본인 기억과 경험도 그대로인데, 주변 사람들의 기억만 초기화됐습니다. 이건 비극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판이기도 합니다. 친구들과 다시 친해질 수도 있고, 아예 다르게 살아볼 수도 있는, 사실상 인생 2회차 같은 조건. 저라면 그 카드로 뭘 할지부터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판을 전략적으로 쓰는 대신, 상처와 회복의 감정에 오래 머뭅니다. 인간적인 겁니다. 이해도 합니다. 다만 저는 보는 내내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진 카드를 안 쓰는 플레이어를 두 시간 지켜보는 기분. 감정이 싫은 게 아니라, 감정이 서사를 앞으로 밀지 않고 제자리에서 반복되는 게 견디기 어려웠던 겁니다.
오디세이 — 3시간이 짧았던 이유
오디세이는 용산 아이맥스로 봤습니다. 3시간짜리인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끝나고 시계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시간이 순식간에 갔습니다.
이게 제일 큰 힌트였습니다. 저는 러닝타임에 둔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지루함이 시간의 길이에서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 새로운 공간, 다음 사건에 대한 궁금증이 계속 공급되면 3시간도 짧습니다. 반대로 같은 감정이 반복되며 이야기가 제자리걸음하면 2시간도 깁니다.
시스템으로 치면 지루함은 처리 시간이 아니라 유휴 시간입니다. 작업이 계속 들어오면 세 시간이 돌아도 체감이 없는데, 같은 작업이 큐에서 맴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시계를 보게 됩니다. 아이맥스라는 환경도 한몫했을 겁니다. 화면과 사운드가 압도적이면 세계를 구경하는 것 자체가 계속 새 입력이 되니까요.
세 편이 알려준 내 취향의 구조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좋아하는 것. 세계관, 탐험, 미스터리, 인물의 전략적 선택, 사건이 사건을 부르는 연쇄, 다음 장면에 대한 궁금증.
참을 수 있는 것. 다소 허술한 CG, 중반의 약간의 늘어짐. 서사가 앞으로 가고 있다면 이런 건 크게 거슬리지 않습니다.
싫어하는 것. 같은 감정을 오래 반복하는 장면, 능력 있는 캐릭터가 고민만 하는 전개, 이야기가 전진하지 않는 느낌.
특히 싫어하는 것. 클라이맥스 직전에 "다음 편에서 계속"을 박아버리는 결말.
이렇게 놓고 보니 평점과 제 재미가 어긋났던 이유도 설명이 됩니다. 평점은 완성도를 재는데, 제 재미는 서사의 추진력을 잽니다. 다른 걸 재는 두 계기판이니 숫자가 다를 수밖에요. 저한테 영화를 추천하려면 별점보다 이 질문 하나가 정확할 겁니다. "이 영화, 계속 새로운 질문을 던지나?"
그래서, 누가 뭘 보면 좋은가
제 취향이 절대 기준은 아니니, 반대로 뒤집어서 추천으로 바꿔봅니다. 세 편 다 "누구에게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호프가 맞는 분. 세계관과 미스터리에 끌리고, 떡밥이 다 회수되지 않아도 다음 편을 기다릴 수 있는 분. 팁은 하나입니다. 저처럼 사전 정보 없이 들어가세요. 그래픽 논란 리뷰를 읽고 가면 단점부터 보이고, 백지로 가면 설정의 신선함부터 보입니다. 반대로 CG 완성도에 민감하거나 한 편 안에서 이야기가 끝나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라면, 2편 나온 뒤에 몰아보는 쪽을 권합니다.
스파이더맨이 맞는 분. 캐릭터의 상처와 회복을 따라가는 서사를 좋아하는 분에게는 저와 정반대의 감상이 나올 영화입니다. 감정선이 풍부하다는 건 그걸 원하는 관객에게는 장점이니까요. 다만 저처럼 전개 중심으로 보는 분이라면 각오는 하고 가시고, 한 가지 관점을 챙겨가면 재미가 달라집니다. "능력과 기억은 그대로인데 관계만 리셋됐다면, 나라면 뭘 할까." 영화가 안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같이 가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오디세이가 맞는 분. 서사가 계속 전진하는 영화를 좋아하면 고민할 것 없습니다. 조건이 하나 있다면 화면입니다. 이건 무조건 큰 화면으로 보세요. 가능하면 아이맥스. 3시간이 부담이라면 그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지루함은 길이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이고, 이 영화는 밀도가 안 빕니다.
호프 2편은 보러 갈 겁니다. 결말 욕을 그렇게 해놓고 다음 편을 기다리는 게 좀 우습긴 한데, 궁금해서 보는 거니까 그 영화는 저한테 절반은 성공한 셈입니다. 감독이 이 글을 볼 일은 없겠지만, 다음엔 힘준 김에 끝까지 싸고 끝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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