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주의자인데, AI 시대에는 큰 정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새벽에 잠이 안 와서 AI 관련 소식을 죽 훑다가, 문득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는 원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입니다. 국가가 개인의 선택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개인과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답을 찾아가는 방식이 낫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정부도 너무 많은 걸 직접 하려 들기보다 꼭 필요한 자리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AI가 굴러가는 걸 계속 지켜보다 보니 요즘 생각이 불편해졌습니다.
AI 시대에도 정말 작은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일까.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늘어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더 이상한 생각도 듭니다. 자본주의와 기술이 너무 잘 굴러간 결과로 생긴 문제를 풀려고, 지금보다 훨씬 강한 재분배를 요구하게 되는 건 아닐까.
AI는 신기술 하나로 끝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인터넷이 나왔을 때도 세상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스마트폰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AI를 보면서 느끼는 변화는 결이 좀 다릅니다.
AI는 산업 하나를 바꾸는 기술이라기보다, 인간이 하던 지적 노동의 원가를 통째로 낮추는 기술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개발자가 하던 일을 일부 합니다. 디자이너가 하던 일도 합니다. 번역하고, 조사하고, 분석하고, 문서를 씁니다. 로봇과 붙으면 육체노동 쪽으로도 넘어갑니다.
거친 사고실험을 하나 해봤습니다.
과거에 1,000명이 필요했던 기업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AI와 자동화가 붙으면서 같은 생산량을 100명이 만들어냅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대단한 일입니다. 생산성이 올라가고, 비용이 줄고, 이익이 늘어납니다. 사회 전체로 봐도 기술 발전입니다.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나머지 900명은 어떻게 되는가.
생산성이 올라가도 모두의 소득이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기술 발전이 사회 전체를 부유하게 만든다는 경험이 쌓였습니다. 길게 보면 실제로 그랬습니다.
다만 AI가 만들어내는 생산성 향상의 과실이 어떤 경로로 나뉠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AI 모델을 쥔 기업. 데이터를 쥔 기업. 컴퓨팅 인프라를 쥔 기업. 반도체를 만드는 기업. 로봇을 만드는 기업. 그리고 이 기업들의 지분을 들고 있는 사람.
생산수단에서 인간 노동의 비중이 줄어들수록 부는 노동보다 자본 쪽에 더 붙습니다.
그러면 이상한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은 역사상 가장 높은데, 상당수 개인의 노동가치는 오히려 떨어집니다.
세상은 더 부자가 됐는데, 정작 그 부를 살 돈이 많은 사람 손에 없는 상황.
기술적으로는 성공했는데 사회 시스템에서는 장애가 난 겁니다. 저는 이 그림이 제일 께름칙합니다.
자본주의가 너무 잘 돌아가서 재분배가 필요해지는 역설
제가 가장 아이러니하게 느끼는 대목이 여기입니다.
AI는 국가가 만든 계획경제 기술이 아닙니다.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과 막대한 민간 자본이 이 속도를 만들었습니다.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 경쟁이 성공해서 AI의 생산성이 극단까지 올라가면, 사회는 오히려 이런 걸 요구하게 됩니다. 더 두꺼운 사회안전망, 직업 전환 지원, 교육 지원, 사회보험. 경우에 따라 기본소득 같은 새로운 소득분배 방식까지.
그림을 그려보면 이렇게 됩니다.
AI·자동화 → 생산성 증가 → 자본소득 증가 → 세금 → 재분배 → 소비 유지
이상합니다. 자본주의가 기술적으로 너무 잘 풀린 결과, 자본주의를 계속 굴러가게 하려고 더 강한 재분배가 필요해집니다.
그렇다고 이걸 곧바로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는 것과, 시장경제를 유지하면서 세금과 사회안전망을 두껍게 하는 것은 다른 얘기입니다.
다만 전통적인 작은 정부의 직관과 부딪히는 지점이 생기는 건 분명합니다.
중국을 보면 또 다른 불편한 생각이 듭니다
AI 경쟁에서 중국이 무섭다고 느끼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AI는 좋은 알고리즘 하나로 붙는 산업이 아닙니다. 반도체가 필요하고, 엄청난 전력이 필요하고, 데이터센터가 필요하고, 통신망이 필요합니다. 로봇과 제조업이 붙고, 교육정책이 연결되고, 데이터 정책이 걸리고, 국가안보까지 이어집니다.
AI 경쟁은 점점 국가 전체의 시스템 통합 능력을 요구하는 쪽으로 갑니다.
이런 판에서는 국가가 전략산업을 정하고 자본과 인프라를 한 방향으로 몰아줄 수 있는 중국식 체제가 특정 영역에서 꽤 강하게 작동합니다. 전력망을 깔고, 공장을 짓고, 데이터센터를 올리고, 산업정책을 붙이고, 기업을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속도. 여기서는 중앙집중형 체제의 장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유주의자인 제 입장에서는 꽤 불편한 장점입니다.
그렇다고 중국식이 정답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과 옳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중앙집중 시스템은 의사결정이 빠르고 자원을 한 번에 몰아줍니다. 대신 결정이 틀렸을 때 치르는 값도 큽니다.
시스템으로 놓고 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강력한 Control Plane 하나가 수많은 Worker를 한 번에 움직인다고 해보겠습니다. Control Plane의 판단이 정확하면 놀라운 속도가 납니다.
판단이 틀리면?
Blast Radius도 시스템 전체가 됩니다. 잘못된 설정 하나가 전 노드로 퍼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저는 운영하면서 이 장면을 몇 번 봤고, 그때마다 속도의 대가가 뭔지 다시 배웠습니다.
자유시장경제는 답답할 정도로 비효율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수많은 기업이 비슷한 걸 개발하고, 투자가 중복되고, 어떤 기업은 망합니다. 정부와 기업의 이해관계도 다르고 의사결정도 느립니다.
그런데 그 혼란 속에서 독립적인 실험이 동시에 여러 갈래로 돌아갑니다. 누가 틀려도 다른 쪽이 다른 방법을 시도합니다. 중앙에서 생각 못 한 게 아래에서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분산 시스템의 강점입니다.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 이 질문이 낡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 논쟁은 이랬습니다. 큰 정부인가, 작은 정부인가.
AI 시대에는 다른 질문이 앞으로 나옵니다. 정부가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설계돼 있느냐.
AI를 지나치게 규제하면 혁신이 죽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소수 기업에 기술과 자본이 몰립니다. 재분배가 지나치면 새로 만들 이유가 사라지고, 너무 약하면 AI로 만들어진 그 엄청난 생산성 향상이 사회적 갈등으로 되돌아옵니다. 국가가 데이터를 지나치게 통제하면 개인의 자유가 깎이고, 완전히 방치하면 거대 플랫폼 기업이 사실상의 데이터 권력을 쥡니다.
어느 쪽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정부도 아키텍처의 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발을 오래 하면 시스템을 볼 때 서버가 몇 대인지부터 세지 않습니다. 어디까지 중앙화하고 어디까지 분산할지, 누가 어떤 권한을 쥘지, 장애가 나면 어디까지 번지는지, 무엇을 자동화하고 무엇은 사람이 승인해야 하는지를 봅니다.
국가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걸 중앙에서 결정하는 시스템도 위험하고, 모든 걸 시장에 맡기는 시스템도 어떤 조건에서는 무너집니다. 중요한 건 책임과 권한을 맞는 자리에 놓는 일입니다.
그렇게 보면 AI 시대의 국가 경쟁력은 정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아키텍처를 얼마나 잘 설계하느냐의 문제로 옮겨갑니다.
자유를 지키려고 더 좋은 정부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개인에게 선택권을 주고, 기업이 자유롭게 도전하게 하고, 실패할 자유까지 허용하는 사회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AI 시대에는 그 자유를 지키려고 정부가 더 정교해져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점을 막고, AI가 만드는 부가 한쪽으로만 쏠리는 걸 들여다보고, 기술 때문에 밀려난 사람에게 다시 경쟁할 기회를 주고, 동시에 새 기술을 만드는 사람의 자유도 지키는 일.
제가 원하는 건 큰 정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작은 정부도 아닙니다.
강하지만 아무 데나 손대지 않는 정부. 물러나야 할 곳에서는 물러나고, 시스템이 무너질 자리에서는 정확히 개입하는 정부. 말은 쉬운데 아마 이게 제일 만들기 어려운 정부입니다.
AI가 발전할수록 기술 경쟁만큼 이 능력의 차이가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AI 시대의 경쟁은 미국 AI와 중국 AI의 싸움만은 아닐 겁니다. 기업 대 기업의 싸움만도 아닙니다. 어떤 사회가 기술의 혁신성과 개인의 자유, 그리고 그 기술이 만든 부의 분배를 가장 잘 조율하느냐.
지금 다들 AI 모델의 성능 경쟁을 보고 있지만, 그 뒤에서는 훨씬 큰 경쟁이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릅니다.
AI 시대에 가장 맞는 국가 운영체제는 무엇인가.
답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는 예전보다 확신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정부가 자연스럽게 작아질 거라는 생각. 정반대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기술이 강력해질수록 필요한 건 더 많은 정부가 아니라, 훨씬 잘 설계된 정부일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써놓고도 저는 여전히 반쯤 자유주의자입니다. 나머지 반은 뭔지 아직 이름을 못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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