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제조업이 거대한 소프트웨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제조업을 가까이서 들여다봤을 때 의외였던 게 하나 있습니다.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습니다.
기계가 돌아가고 철판이 쌓여 있고 사람이 용접하고 조립하고 배선합니다. 겉만 보면 제가 오래 해온 IT와 아무 접점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한 겹 걷어내고 보니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습니다. 공장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소프트웨어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철판을 보지 않고 흐름을 보기 시작했다
제품 하나를 만든다고 놓고 보겠습니다.
고객 요구사항이 들어옵니다. 설계합니다. 필요한 자재를 계산하고 구매합니다. 철판을 자르고 가공합니다. 부품을 조립하고 배선합니다. 검사하고 출하합니다. 제조에서는 이걸 생산공정이라고 부릅니다.
개발자 눈으로 보면 같은 줄이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요구사항 → 설계 → 의존성 확보 → Build → Assembly → Test → Release
소프트웨어 개발과 놀랄 만큼 겹칩니다. 원자재와 부품은 Input입니다. 제조공정 하나하나는 Function이고 공정과 공정 사이에는 Interface가 있습니다. 완성된 제품은 Output, 검사는 Test, 불량은 Exception입니다. 작업 기록과 센서 데이터는 Log와 Metric에 해당하고 공정 개선은 Refactoring에 가깝습니다.
그러고 나니 현장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도 달라 보였습니다. 사람이 철판을 옮긴다는 사실보다, 왜 하필 저 시점에 저 철판이 저 자리로 가야 하는가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보다 Data Flow와 Process Flow를 먼저 본 겁니다.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입니다.
제조업에도 API가 있다
IT에서는 시스템끼리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습니다. 입력값과 출력값을 정해두고 인터페이스를 만듭니다. 대표적인 게 API입니다.
제조에도 이름만 다른 게 있습니다. 앞 공정에서 나온 결과물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갈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치수는 얼마여야 하는지, 가공 상태는 어때야 하는지, 어떤 자재가 함께 넘어가야 하는지, 어떤 검사가 끝나 있어야 하는지.
이 조건이 헐겁게 정의돼 있으면 다음 공정에서 문제가 터집니다. 개발자에게는 익숙한 장면입니다. Interface Contract가 깨진 겁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이 인터페이스의 상당 부분을 사람이 메우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래 이렇게 해서 넘겨." "이건 다음 공정 김 대리한테 말해주면 알아." "이 제품은 조금 다르니까 조심해야 해."
시스템으로 보면 꽤 흥미로운 장면입니다. 명세에 없는 로직을 사람이 기억해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숙련공은 어쩌면 거대한 레거시 시스템이다
여기서 생각이 한 발 더 나갔습니다.
제조업에는 숙련공이 있습니다. 20년, 30년 같은 분야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아온 사람들입니다. 기계 소리만 듣고 이상을 알아차리고, 철판 상태를 보고 가공 방법을 조금 바꾸고, 도면에 없는 작은 문제를 경험으로 넘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이런 답이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해보면 알아."
IT 관점에서 이 말을 뒤집어보면 재미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기능이 계속 붙었는데 문서는 부족한 시스템. 중요한 비즈니스 로직이 코드 곳곳에 흩어져 숨어 있는 시스템. 담당자가 나가면 아무도 정확한 동작 원리를 모르는 시스템. 이런 걸 보통 레거시 시스템이라고 부릅니다.
제조업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다만 로직이 코드가 아니라 사람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건 김 반장님 없으면 안 돼."
사람으로 보면 김 반장님의 뛰어난 기술입니다. 시스템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회사가 돌아가는 데 필요한 공정 일부가 한 사람에게 묶여 있습니다. IT에서라면 꽤 위험한 구조입니다. Single Point of Failure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구조를 처음 봤을 때 답답했습니다. IT였다면 문서화부터 걸고 넘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며칠 더 지켜보고 나서는 조금 물러섰습니다. 그 사람 머릿속에 있는 판단을 문서 몇 장으로 옮길 수 있다고 믿는 쪽이 오히려 안이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AI가 등장했다
예전에는 이 문제를 풀기가 어려웠습니다. 매뉴얼을 쓰게 하고, 동영상을 찍고, 작업표준서를 만듭니다. 거기까지는 합니다. 다만 본인도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경험까지 문서로 옮기는 건 다른 얘기입니다. 이걸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부릅니다.
AI가 이 지점을 조금씩 흔들고 있습니다. 영상 AI가 발전하면서 사람의 행동 자체가 데이터가 됩니다.
어떤 부품을 먼저 잡았는지. 어떤 순서로 작업했는지. 어느 위치를 확인했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어떤 상황에서 평소와 다르게 움직였는지.
여기에 센서를 붙이면 정보가 더 붙습니다. 압력, 토크, 온도, 전류, 진동, 위치, 작업시간. 마지막에 품질검사 결과를 연결합니다.
그러면 사람 머릿속에만 있던 경험 일부가 이런 형태로 바뀝니다.
상황 → 판단 → 행동 → 결과
저는 이 구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AI가 사람의 말을 배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이 일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로봇이 연결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여기까지는 AI가 사람을 관찰하는 단계입니다. 그다음에 로봇이 붙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관찰합니다. 데이터를 쌓습니다. AI가 패턴을 찾습니다. 로봇이 실행합니다. 결과를 검사하고 그 결과를 다시 학습합니다.
구조만 놓고 보면 간단합니다.
Observe → Learn → Execute → Measure → Improve
제가 IT 시스템에서 오래 봐온 피드백 루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이게 큽니다. 소프트웨어는 데이터를 움직이지만 제조 시스템은 현실의 물질을 움직입니다. 철판을 자르고 구멍을 뚫고 부품을 조립하고 전선을 연결합니다. 말 그대로 현실 세계에서 실행되는 소프트웨어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제조업을 배우는 방법도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새 산업 하나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꽤 들었을 겁니다. 용어부터 익히고 공정을 공부하고 현장 사람들에게 묻고 자료를 뒤집니다.
지금도 현장 경험은 중요합니다. AI가 물리법칙이나 몸으로 겪은 시간을 대신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제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체계로 옮기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습니다.
모르는 제조 용어가 나오면 AI에게 묻습니다. 공정 설명을 들으면 시스템 구조로 바꿔서 이해합니다. 전기 현상은 전자공학 지식과 붙이고 생산 프로세스는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와 붙입니다. 센서는 Observability로, MES는 상태관리 시스템으로, 공정 간 연결은 Interface로, 불량 분석은 Debugging으로 읽습니다.
그러면 새 분야를 처음부터 외우는 작업이 아니게 됩니다. 제 머릿속에 이미 있는 아키텍처에 새로운 산업을 Mapping하는 쪽에 가까워집니다. AI는 이 과정에서 꽤 강력한 번역기 노릇을 합니다.
하지만 제조업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제조업을 소프트웨어처럼 이해하는 것과 제조업이 소프트웨어처럼 쉽다는 건 전혀 다른 말입니다.
코드는 고쳐서 다시 배포하면 됩니다. 철판은 한번 잘못 자르면 Ctrl+Z가 없습니다. 프로그램은 복제 비용이 0에 가깝지만 제품에는 원자재가 들어갑니다. 서버는 롤백하면 되지만 잘못 가공한 제품은 폐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제조에는 안전, 공차, 재료 특성, 열, 전기, 힘이라는 물리법칙이 버티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는 Rollback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제조업에 시스템 사고를 얹는 일이 재미있습니다. 소프트웨어의 사고방식과 현실의 제약조건을 같이 다뤄야 하니까요.
AI 시대에는 산업을 바라보는 방법 자체가 바뀔지도 모른다
AI의 가장 큰 힘이 답을 대신 찾아주는 데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을 잇는 비용을 확 낮춰준 쪽이 저에게는 더 크게 다가옵니다.
전기와 전자. 기계와 제조.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 데이터와 AI. 예전에는 각각 다른 전문가의 영역처럼 보였습니다. 한 단계 위에서 보면 비슷한 질문으로 모입니다.
무엇이 입력되는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어디에서 상태가 바뀌는가.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는가.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 어떻게 더 나은 결과를 만들 것인가.
저는 제조업 앞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공장이 공장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Input을 받아 수많은 Process를 거쳐 현실 세계에 Output을 내놓는 커다란 시스템. AI와 로봇이 붙으면서 그 시스템은 점점 더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데이터로 남고 스스로 더 나은 값을 찾아갈 여지가 생기고 있습니다.
미래의 공장은 자동화된 공장 정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경험을 쌓고 실행하고 결과를 재고 다시 고치는 하나의 커다란 소프트웨어 시스템. 저는 제조업을 그렇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각이 어디까지 맞는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다음 편에서는 공정을 아키텍처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공정 배치가 왜 시스템 설계와 같은 문제인지, 병목은 어디에서 생기는지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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